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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의 후손으로서 조선왕조에서 좌의정에 오른 사람이 네 명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의 외조부 되는 안천보(安千保)인데,
그는 세종 초 좌의정의 관작만 받았을 뿐,
실직을 맡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3정승 명단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좌의정 자리에 앉아서 경륜을 펼친 인물은 제 11대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영모당(永慕堂) 안당(安塘)과 제 13대 명종 때 좌의정을 지낸 설강(雪江) 안현(安玹) 두 사람이다.
영모당 안당은 그의 아버지 안돈후(安敦厚)가 평양 별시문과에 급제한 1460년 세조 6년에 출생했다.
그리고 제9대 성종 11년 21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성종이 친히 시험관이 된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다른 관원에 비해 나이 젊고 용모가 연약하여 성종이 아장자(亞長子)라고 놀렸으나, 주견이 확고했다.
연산군 5년 40세로서 사성일 때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지의금부사 때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대사간으로 특임되었다.
그리고 중종 2년에는 대사성 이과(李顆)가 반정공신으로서 전산군(全山君)에만 봉해진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다 미연에 발각된 옥사를 잘 다스린 공으로 정란공신 3등이 되고,
중종 4년 예조참판으로서 명 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왔다.
그 후 호조·형조·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중종 1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이조판서가 되자, 우선 정언이었던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士林派)의 신진들을 적극 중용토록 했다.
이어서 중종 13년에 좌찬성에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60세로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좌의정이 되자, 영의정인 수천(守天)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중종에게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와 파직 유배된 김식·김정 등 70여 명의 사림파 신진들의 신원을 상주했다.
그러나 도리어 훈구파에 의하여 파직되고 작위까지 삭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자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安處謹)의 아들 형제가 훈구파의 영수인 남곤·심정 등을 제거할 모의를 했다.
그러나 그 모의가 서고모(庶姑母)의 아들인 송사련(宋祀連)의 밀고로 탄로가 나는 통에
그도 두 아들과 함께 사사되고 말았다.
역사에서 말하는 신사무옥(辛巳誣獄)이다.
영모당 안당은 사후 45년이 지난 명종 21년에 관작이 복구되고 '정민(貞愍)' 시호를 받았다.
그가 정승으로서 이룩한 큰 공적은 연산군 때 사화로 희생된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의 관작을 추증토록 했고,
배향되었다가 취소된 포은 정몽주를 다시 소릉(昭陵)에 배향토록 한 일들이다.
소릉은 단종의 생모인 문종비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다음, 설강 안현은 회헌 안향의 11세손으로서 1501년 연산군 7년에 출생하여
중종 16년 21세 때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종9품직인 교서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관로에 올랐다.
'권지'는 시체말로 '견습'이란 뜻이다.
이윽고 검열을 거쳐 28세 때 정7품의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가 좌랑 박광우의 무고로 삭직되어
일시 투옥되었다가 곧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주서보다 낮은 정8품의 예문관대교에서 다시 지평·응교·장령·사간을 거쳐
집의가 되어서는 경차관(敬差官)을 겸했다.
경차관은 임시로 지방에 나가 전곡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직책으로 어사와 같은 임무이다.
이어서 부제학이 되었다가 46세 때 경상도관찰사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고 백운동서원을 중수했다.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소수'라는 사액을 받아걸기 4년 전이었다.
이듬해 명종 2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한성부좌윤·한성부판윤을 거쳐 51세 때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우참찬과 호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좌찬성을 역임하고,
1558년 명종 13년 58세 때 우의정에 올랐다가 이내 좌의정이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는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의약의 처방에도 정통했다.
또 40년의 관직생활을 청렴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청백리로 뽑히고,
1560년 명종 15년 60세의 향년으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문희(文僖)' 시호를 받았다.
또 설강 안현보다 10세 연상이었던 그의 형 문간공(文簡公) 안위(安瑋)가 그와 같은 해
별시문과에서 병과 급제하여 후일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이들 형제는 순흥안씨 최초 족보인 병오보를 간행했다.
그밖에 상산(橡山) 안집(安集)이 있다.
그는 영조 14년에 36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지평·정언·장령을 거쳐
영조 22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 후 수찬·헌납·승지를 역임하고, 대사간일 때 고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는 특별히 대사간을 10년이나 역임했는데,
62세로 대사간 10년이 되는 해에 차대(次對)에 불참했다가
일조에 정3품 대사간에서 종6품 흥덕현감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은인자중 노력한 끝에 1774년 영조 50년의 등준시에 72세의 고령으로 을과 급제하여 껑충 공조판서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까지 누렸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종1품의 판돈녕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