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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순흥안씨(順興安氏)의 관향(貫鄕)은 순흥(順興)이다.
순흥은 현재 경북 영주시(榮州市) 순흥면인 석교리(石橋里. 순흥부 죽계 상평리촌<上坪里村>)서
시조 호군공(護軍公) 휘 자미(子美)께서 탄생하시고 대대로 세거(世居)하셨음으로 우리의 관향이 된 것이다.
순흥은 동서 五리, 남북 十리의 광활한 일광지지(日光之地)로 산수(山水)의 경치가 맑고 아름다우며 아늑하여
명문(名門)의 고장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고을이다.
이 고장의 주위를 살펴 보면
비봉산(飛鳳山), 영귀산(靈龜山), 연화봉(蓮花峰), 학가산(鶴駕山), 문필봉(文筆峰), 연자봉(燕子峰) 등
병풍을 두른 듯한 산들이 있고,
죽계(竹溪)의 맑은 물이 주야로 흐르며
그 주위에 제월교(霽月橋 청다리) 광풍대(光風臺), 죽계구곡(竹溪九曲), 백운담(白雲潭) 등의 명승절경(名勝絶景)이
즐비하게 연결되어서 아름다운 풍치를 더한층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성조(聖祖)를 위시하여
조정에서 시호(諡號)와 봉군(封君)을 받으신 위대한 명조(名祖)가 많이 배출(輩出)되어
순흥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하셨다.
이제 순흥의 시대적 변천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시대에는 급벌산군(及伐山郡)이라 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632~646) 좌대야성 도독하장 죽죽(左大野城 都督下將 竹竹)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사이의 소백산 중턱을 넘는 도로를 개통하고
고개이름을 죽령(竹領)이라 하고 소백산에서 순흥, 풍기(豊基)로 흐르는 물을 죽계(竹溪)라 하였는데
여기서 순흥의 별호를 죽계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가 점령한 후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742~746)에는 급산군(岌山郡)이라고 고쳤다.
고려초에는 흥주(興州)라고 고쳤다.
고려 6대 성종(成宗·982∼997)때 순정군(順政郡)이라고 고쳤다.
고려 8대 현종(顯宗) 9년(118)때에는 지금 안동인 길주(吉州)에 속하였다.
뒤에 17대 명종(明宗) 1년(271)때에 처음으로 감무(監務.작은 현(縣)의 감독관, 후에 현감(縣監)으로 개칭)를 두었다.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때 (1275~1308)왕이 탄생한 후 태(胎)를 순흥에 묻으면서
흥녕현(興寧縣)으로 승격시키 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1314)에 또다시 충숙왕의 안태지(安胎地)가 되므로
흥주(興州)로 승격시켜 지사(知事)를 두었다.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 4년(1348)에 또다시 충목왕의 안태지가 되므로 순흥부(順興府)로 승격시켰다.
조선조 3대 태종(太宗) 13년(1413)에는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승격시키고 별호(別號)를 순정(順政)이라 하였다.
조선조 7대 세조(世祖) 3년 (1457)에 이곳으로 유배(流配)되어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이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는 모의(謀議)가 사전에 발각되어
순흥은 쓱대밭이 되고 세조는 부(府)를 폐하였다.
그리고 풍기군(豊基郡)에 소속시키고 각 면(面)을 마아령(馬兒嶺)과 문주산(文珠山)에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나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분할시켜 놓았다.
조선조 19대 숙종(肅宗) 9년(1683)에 18세조 첨추공(僉樞公) 휘 석휘(錫徽)께서
순흥의 유생(儒生) 이정식(季廷植)등 50명을 규합하여 대궐 앞에 나아가상소 하였던 바
문성공(文成公)의 도덕공훈을 표창하여 순흥 복구를 허락하여 순흥부(順興府)로 복원되었다.
조선조 28대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郡)이 되었다.
1914년에 군을 폐하고 화천면(花川面), 수민단면(壽民丹面), 수식면(水息面)은 봉화군(奉化郡)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영주군(榮州郡)으로 들어갔다.
그 후 영주가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시에서 제외된 지역과 풍기군을 합하여 영풍군(榮豊郡)이 되므로
여기에 순흥면이 속해졌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주시 순흥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