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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는 고려왕조 후기에서 조선왕조 초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나라 안에서 첫손가락을 꼽는 명문 세가였다.
그 사실은 사후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은 회헌 안향의 후손 가운데 고려 말까지 산 사람으로
'글월문[文]'으로 시작되는 시호를 받은 사람이 7명이나 되고,
조선조에 '문'으로 시작되는 시호를 받은 후손이 4명인데,
그 밖의 시호를 받은 후손 또한 7,8명이나 되는 사실(史實)이 훌륭히 입증해주고 있다.
더구나 고려시대에 살고 시호를 받은 회헌 안향의 후손들은 모두 10촌이 넘지 않는 가까운 촌수였다.
'문'으로 시작되는 시호를 받은 회헌 안향의 후손들을 보다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회헌의 아들 안우기(安于器)가 고려 공민왕 때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사후 '문순(文順)'의 시호를 받았다.
이어서 안우기의 8촌인 안문개(安文凱)가 순흥부원군의 봉작과 사후 '문의(文懿)' 시호를 받았다.
다시 한 대를 내려와서, 안우기의 아들 안목(安牧)이 순흥군의 봉작에다 '문숙(文淑)' 시호를 받았고,
안석의 아들인 안축(安軸)이 '문정(文貞)' 시호를, 안축의 동생 안보(安輔)가 '문경(文敬)' 시호를 받았다.
안목과 안축·안보 형제는 10촌간의 촌수였다.
특히 안축·안보 형제는 고려조의 대과에 급제했을 뿐만 아니라,
원 나라의 대과에까지 나란히 급제하여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에 대해 조선왕조 개국 초 나라 안 전체의 학문을 다 합쳐도 그 한 사람의 학문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석학 목은 이색(李穡)은 안보의 비문 속에서,
중국의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고려인으로 형제나 부자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한 예는 안축·안보 형제가 처음이고,
다음이 자기네 부자뿐이라고 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근재(謹齋) 안축의 문하생으로서 근재 사후 그의 비문을 썼으며,
안보는 목은 이색이 과거에 응시했을 때 시험관이라는 연관이 있었다.
또 근재 안축은 경기체가(景幾體歌)의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읊어서
그의 문집인 《근재집(謹齋集)》과 함께 오늘에 전하는 대시인이기도 하다.
다시 한 대를 내려와서 안목의 아들 안원숭(安元崇)이 정당문학의 벼슬을 역임하고 사후 '문혜(文惠)' 시호를 받았다.
그밖에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안축의 아들인 안종원(安宗源)이 사후 '문간(文簡)' 시호를 받았고,
안종원의 증손자인 안숭선(安崇善)이 사후 '문숙(文肅)' 시호를 받았다.
호를 쌍청당(雙淸堂)이라 한 안종원은 고려왕조에서 흥녕부원군의 봉작과 판문하부사의 벼슬에 오른 명신이었다.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한 다음 1394년 태조 3년에 쌍청당에게
고려조와 동일한 관직을 가지고 명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줄 것을 간청하였다.
개국 초 조정에 쌍청당 만큼 이성계의 등극을 이해해 줄 원로대신이 없었고,
또 쌍청당의 높은 학문과 덕망은 명 나라 조정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쌍청당은 태조가 된 이성계의 간청을 마지못해 수락하여
명 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그해 71세의 향년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리고 고려조의 명신으로 사후 '문'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아닌 다른 시호를 받은 인물로는,
안천선(安千善) 시호 '양정(良定)', 안천선의 큰아들 안손주(安孫柱) 시호 '경혜(景惠)',
셋째 아들 안천보(安天保) 시호 '소의(昭懿)' 등이 있으며,
고려에서 조선에 걸쳐 살아서 사후 시호를 받은 인물로는, 안원숭의 큰아들 안원(安瑗) 시호 '경질(景質)',
둘째 아들 안조동(安祖同) 시호 '양공(良恭)', 안손주의 아들 안준(安俊) 시호 '충정(忠靖)',
안천보의 아들 안수산(安壽山) 시호 '소간(昭簡)',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安景恭) 시호 '양도(良度)',
안경공의 아들 안순(安純) 시호 '정숙(靖肅)' 등이 있다.
증언한다면, 문성공 회헌 안향을 최초의 시호 받은 인물로 해서
고려조에서 조선조 초기에 걸쳐 산 그의 직계손과 방손 가운데서 사후 시호를 받은 인물이 20명이 넘고,
그들의 촌수가 멀어서 16촌일진대,
어찌 순흥안씨를 고려 제일의 명문이라 하지 않을 수 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