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순흥안씨네는 그들의 문중을 1, 2, 3파로 구분하고 있다.
시조의 아들이 3형제였기 때문이다. 회헌 안향은 순흥안씨의 4대손으로 시조의 증손자이고, 1파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5대손 되는 순흥부원군 안문개와 아들 안천선 손자 안천보 등은 2파이고,
3대손 되는 근재 안축과 안보 형제와 그 자손들은 3파에 속한다.
이상의 3개파 가운데서 자손들이 제일 많이 현달한 곳은 3파로 알려져 있다.
조선조에서 제일 먼저 거론해야 할 쌍청당 안종원의 약력은 이미 앞에서 적었다.
두 번째 인물은 안천보이다.
그는 1339년 고려 충숙왕 8년에 출생하여 25세 때인 공민왕 12년에 등과한 다음,
별장·군기시윤·판사복시사를 거쳐 공조전서에 이르러 해직 당했다.
그 후 16년간을 거문고와 글씨로 소일하다가 조선조 제3대 태종 8년 70세 때 검교 한성판윤으로 임명되고,
이듬해 검교 참찬을 거쳐 검교 찬성이 되었다가, 제 4대 세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세종 즉위 초 영의정이 된 심온(沈溫)의 장인이고,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외조부였다.
소헌왕후가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태종과 세종이 특별히 공대하였으나,
그는 평생을 충직과 근신으로 일관했다.
1425년 세종 7년 영돈녕부사 때 87세의 향년으로 일생을 마치고, 사후 '소의(昭懿)' 시호를 받았다.
그의 관직 앞에 붙인 '검교'는 실무는 보지 않고 관직만 가질 경우 그 관직 앞에 붙이는 대명사이다.
세 번째 인물은 안원이다. 그는 정당문학 안원숭의 장남이고 회헌 안향의 현손이다.
1346 년 고려 충목왕 2년에 출생하여 공민왕 23년 29세 때에 대과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전서를 거쳐
공양왕 2년 좌부대언일 때 한양으로 천도론이 나오자, 반대 저지했다.
공양왕 4년 지신사(知申事) 때 지난 옥사에 연루된 혐의로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조선의 개국을 맞았다.
이성계의 배려로 순흥으로 이배되었으나,
이내 용서되어 우군동지총제의 관직으로 명 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다.
귀국할 때 《대학연의》·《통감집람》 등 서적을 가져와서 태조 이성계에게 바쳤다.
태종 4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이어 대사헌·판한성부사·개성유후·동서강등처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태종 11년 65세의 향년으로 죽은 뒤 '경질(景質)' 시호를 받았다.
네 번째 인물은 안경공이다.
그는 쌍청당 안종원의 셋째 아들로 1347년 고려 충목왕 3년에 출생하였는데,
앞의 안원보다 한 살 아래의 14촌 동생이 된다.
우왕 2년 30세로 대과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지평을 거쳐 이성계의 조선 개국 때 밀직사 좌부대언(조선조의 좌부승지)이었다.
그는 개국공신 3등이 된 후 도승지·관찰사·보문관학사·한성부윤을 역임하고 집현전 대제학에 올라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째 흥녕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
1421년 세종 3년 향년 75세로 타계하여 '양도(良度)' 시호를 받았다.
그의 형 안경온(安景溫)은 벼슬이 고려조에서 밀직사에 이르렀고,
동생 안경검(安景儉)은 고려조의 집의에서 조선조의 산기상시에 이르렀다.
다섯 번째 인물은 죽계(竹溪) 안순(安純)이다.
그는 대제학 안경공의 아들로 1371년 고려 공민왕 20년에 출생하여
창왕 1년 약관 19세로 대과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좌습유를 지냈다.
조선조 개국 후 우대언·우참의·동지총제·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세종 1년 호조참판으로 명 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서 호조판서·판중추원사 겸 판호조사·찬성사를 지냈다.
그는 세종 22년 향년 70세로 죽을 때까지 나라의 돈과 곡식을 관장하는 판호조사의 벼슬을 지냈다.
사후 '정숙(靖肅)' 시호를 받았고, 그의 유고가 증조부 근재 안축의 문집 《근재집》 에 수록되어 있다.
여섯 번째 인물로는 옹재 안숭선과 그의 동생 한백당(寒栢堂) 안숭효(安崇孝)를 들 수 있다.
두 형제는 죽계 안순의 아들인데,
말하자면 옹재 안숭선부터가 조선조에서 출생한 순흥안씨 후손의 역사적 인물이 되는 셈이다.
안숭선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조를 개국한 해에 태어났다.
그는 세종 2년 29세 때 식년시 대과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5품의 사헌부 지평에 특임된 후
이조정랑·형조좌랑·지신사·동부대언·대사헌·경기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 때
명 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와서 집전대제학이 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이듬해에는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세종 30년 병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일 때 인사문제를 정실로 처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잠시 진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내 풀려나서 좌참찬을 지냈다.
명필이었고, 문종 2년 61세의 향년으로 죽은 뒤 '문숙(文肅)' 시호를 받았다.
그의 유고가 고조부의 문집인《근재집》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다음 한백당 안숭효는 죽계 안순의 4남이고 옹재 안숭선의 동생으로
진사시를 거친 뒤 음보로 장령·호조참의·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 2등이 되고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명 나라에 진향사로 다녀온 뒤
공조참판·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을 역임했다.
세조 6년 충청도에 홍수 피해가 클 때 특명으로 도관찰사로 나가 이재민을 훌륭히 진휼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칭송을 받았으나 그해에 죽었다.
이상이 조선조 초기에 살면서 벼슬이 2품 이상에 오르고 시호를 받은 순흥안씨 문중의 역사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