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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에 의해 순흥안씨네가 철퇴를 맞은 사실을 먼저 약술하기로 한다.
1456년 세조 2년 6월 사육신에 의한 단종복위 계획이 배반자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가자,
사육신과 그 가족은 무참히 피살되고 아울러 70여 명에 달하는 연루자가 처벌을 받았다.
'피끈의 悲史'로 철퇴를 맞은 순흥안씨네는 세조·예종·성종의 3대 40년 동안에는
2품 이 상의 관직에 오른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제10대 연산군과 제 11대 중종 대에 이르러
안호(安瑚)·안침(安琛) 형제가 나란히 2품 이상의 벼슬에 올라 순흥안씨의 성가를 다시 세상에 떨쳐주었다.
그런데 그들 형제가 세조 12년 강원도 고성에서 실시된
별시 문과에 서 나란히 장원(壯元)과 아원(亞元) 급제를 했다는 것은
'피끈 비사'로 많은 아까운 인재를 잃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역사의 아이러니인 것만 같다.
안호·안침 형제는 회헌 안향의 8세손이고,
전주부윤과 대사성을 역임한 안지귀(安知歸)의 아들 5형제 중 장남과 3남이었다.
안호는 23세 때 진사가 되고,
세조 12년 30세로 강원도 고성에서 실시된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7품의 예문관 봉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영의정 조석문(曺錫文)과 대제학 노사신(盧思愼)이 어명으로
편찬한 《북정록(北征錄)》에 같은 사관인 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북쪽 6진 주변의 자세한 지명과 지도를 여러 문헌에서 찾아 모아 삽입했다.
《북정록》은 세조 초 북방 6진을 침범한 여진족을 정벌한 기록이다.
안호는 그 후 지평·부제학·대사간·병조참지 등을 역임하고,
예조참의 때 관압사(管押使)로 명 나라를 다녀왔다.
관압사란 여진족 등 야인에게 끌려갔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온 명 나라 사람들을 명 나라로 데려다 주는 사신이다.
그는 명 나라를 다녀온 후 전주부윤·형조참 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502년 연산군 8년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67세의 향년으로 병사했다.
백씨인 안호보다 7세 연하였던 안침은 호를 죽창(竹窓), 또는 죽계(竹溪)라 했고,
송설체(松雪體) 해서의 당대 명필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 교하에 있는 영의정 방촌 황희의 비문을 비롯하여 광주에 있는 좌찬성 한계희의 비문,
시흥에 있는 판의금부사 월성군 이철견(李鐵堅)의 비문 등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죽창 안침은 19세 때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여 세상에 수재로 이름이 나고
23세 때 강 원도 고성에서 실시된 별시문과에서 백씨에 이어 2등급제를 하여 또 한 번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정9품의 홍문관 정자를 시작으로
부수찬·정언·이조정랑·교리·응교·장령 등 줄곧 옥당과 대간의 명예로운 관직만 역임하고
부제학·승지·예조참의를 거쳐 지중추부사로서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왔다.
그 후 대사성·이조참판을 지내고 동지춘추관사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한때 좌천되었다가
다시 한성부우윤·대사헌·호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등을 거쳐
63세 때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 선정을 베푼 끝에 서북지방에 명망을 떨쳤다.
그해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그는 일단 사직원을 냈으나 반려되었다.
그 후 1514년 중종 9년 71세로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72세의 향년으로 타계했다.
사후 '공평(恭平)' 시호를 받았다.
그밖에 죽창 안침보다 7세 연하이고, 5형제의 막내인 안기(安璣)가
45세의 만학으로 연산군 1년의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정6품의 성균관전적에 이르렀고,
둘째와 넷째 또한 사마시에 합격함으로써 만천하에 5형제 등과라는 우레와 같은 명성을 떨쳤다.
안동군 임하면 천전의 의성김씨 후손인 약봉 김극일과 학봉 김성일 5형제의 등과보다 7,8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안호의 아들 안처선(安處善)은 연산군 3년의 별시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좌랑에 이르렀고,
안침의 아들 안처성(安處誠)은 연산군 10년의 식년시 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벼슬이 정(正)에 이르렀다.
그리고 안기의 아들 안처순(安處順) 또한 중종 9년의 별시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벼슬이 또한 정에 이르렀다.
'정'이란 관직은 비록 정3품 하의 품계이나,
사복시·군기시·내자시·예빈시·군자감·전의감·선공감·사재감 등의 우두머리 벼슬이다.
증언한다면, 전주부윤과 대사성을 지낸 안지귀의 아들 5형제와 손자들 가운데서 대과 문과 급제자가 6명이나 배출되고,
더구나 그중 2명이 2품 이상의 높은 벼슬에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그들을 순흥안씨를 중흥시킨 인물이라 부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