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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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三韓時代)
변한에 속해 있는 이 지방은 당시 변진(弁辰) 안야국(安耶國)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인근에는 오늘날의 김해지방(金海地方)인 구야국(拘耶國)과 남쪽으로 포상팔국(浦上八國)에 접해 있던
이 안야국(安耶國)은 당시로서는 대국이었던 것이다.

가야시대(伽倻時代)
그후 가야시대(伽倻時代)가 열리면서
이곳에 가야왕국(伽倻王國)이 성립(成立)된 육가야(六伽倻)중의 하나인 아라가야(阿羅伽倻)가 되고 수도가 된 것이다.
함안군 가야읍(咸安郡 伽倻邑)에는 옛 궁지(宮趾)가 남아있고 왕릉(王陵)도 數十基(십수기)를 볼 수 있다.

신라시대(新羅時代)
신라(新羅)의 소국정복(小國征服)의 손길이 이곳에도 뻗어
법흥왕(法興王)때 정복(征服)되어 가야국(伽倻國)은 없어지고 신라(新羅)의 아시량군(阿尸良郡)이 되었다.
경덕왕(景德王.757년)에 함안(咸安)이라 개칭(改稱)되었다 한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조(高麗朝)에서 함주자사(咸州刺使)를 두었던 때도 있었고 김해(金海)에 속(屬)했던 적도 있었고
현(縣)으로 격하(格下)된 때도 있었다가 공민왕(恭愍王)22년(1373년) 다시 군으로 승격(昇格)되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조 연산군11년(朝鮮朝 燕山君11年)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昇格)되었다가
1506(中宗元年) 군지사(郡知事)로 개칭(改稱)되었다.
1906년 칠원현(漆原縣)을 합병(合倂)하여
현행(現行) 가야(伽倻) 함안(咸安) 산인(山仁) 법수(法守) 대산(代山) 군북(郡北) 여항(艅航)
칠원(漆原) 칠서(漆西) 칠북(漆北) 등 각면(各面)을 관할(管轄)하는 형태(形態)로 정비(整備)된 것이다.

함안향(咸安鄕)과 안문(安門)의 위치(位置)
거금 사백여년전(去今 四百余年前) 한강 정구(寒岡 鄭逑).
대학자(大學者)로서 시호(諡號)가 문목공(文穆公)이라는 분이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익년(翌年) 선조(宣祖)21년에 함주지(咸州誌)라는 읍지(邑誌)를 저편(著編)하면서
함안 조삼공(咸安 趙參公)의 무진정(無盡亭)과 취우정(聚友亭)을 등재(登載)함으로써
양정(兩亭)이 함안(咸安)의 정칭시원(亭稱始源)의 공식유래(公式由來)가 되었고,
양정(兩亭)이 모두 주인공(主人公)의 아호(雅號)이며 정호(亭號)로서
영남일원(嶺南一圓)에 명성(名聲)이 광포(廣布)되었는데
그때가 취우정선생 서후(聚友亭先生 逝後) 95년 되던해로서 후손(後孫)의 수(數)래야 3,4호에 불과(不過)하였으니
정한강(鄭寒岡)의 안목(眼目)은 수량(數量)에 구애되지 아니했다 함을 알 수가 있다.
그 백년전(百年前)선생의 재세시(在世時)에 세칭함주삼군자(世稱咸州三君子)로
취우정안관(聚友亭安灌) 무진정조삼(無盡亭趙參), 완천당박덕손(浣川堂朴德孫) 삼선생(三先生)이
세상에서 행한 풍성(風聲)이 전래(傳來)하고 있음과 양조(兩朝)에 걸처
망족중망족(望族中望族)이요 문가중(聞家中)의 문가(聞家)의 가통(家統)이요
혈손(血孫)임을 정한강(鄭寒岡)이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취우정선생 서후(聚友亭先生 逝後)에는 끊임없이 문인(門人)들이 모여들어
유계(儒契)가 감당(勘當)하기 어려워 입계(入契)를 제한 엄선(制限 嚴選)하게 이르렀고,
향시(鄕試)나 초시과거(初試科擧)에 취우정(聚友亭)의 추천상(推薦狀)이
응시자격(應試資格)의 구비요건(具備要件)으로 등장(登場)된 때도 있었다고 한다.
취우정유계(聚友亭儒契)의 계원(契員)됨이
일신(一身)의 영광(榮光)으로 가첩(家牒)에 기재(記載)하여 놓은 것을 근래(近來)에 와서도
그 후손(後孫)들이 자랑삼아 제시(提示)하는 것을 견문(見聞)한 바 있다.
그리고 본향내(本鄕內)에는 직장공(直長公)후손인 일파종족(一派宗族)들이 적지 않게 혼거(混居)하고 있다.
함주지(咸州誌)에 산하지령(山河至靈)과 향민(鄕民)이 모두 편안하게 되리라 하여
군명도 파산 또는 성주라 하였던 것을 함안이라 함이 마땅하다 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호칭되고 있다.

임진왜란중(壬辰倭亂中)의 이변(異變)
임진왜란중(壬辰倭亂中) 명나라 장수이여송(將帥李如松)을 따라온 도술지사(道術地士)가
조선국지도(朝鮮國地圖)를 펼쳐놓고 면밀색탐(綿密索探)하더니
이 나라 소국이 대국을 능가(凌駕)할 과람(過濫)한 지세(地勢)를 보유(保有)하고 있으니
이것을 꺽지 않으면 중원(中原)을 능멸(凌蔑)할 것이라 하여
붓으로 지도상(地圖上)의 몇군데 혈맥(血脈)을 끊었다 한다.
그 당해 현지(當該現地)에는 칼로 잘라낸 듯한 구덩이나 골짝이 생겼다하는데
본군내에도 가야읍(伽倻邑) 질목마을과 산인면 가사대(山仁面 佳士垈) 마을 후등(後嶝)과
군북면 하림(郡北面 下林)마을 등에 그런 곳이 있는데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에 별안간 지동(地動)이 일어나고 산목이 갈라지고
거기서 목이 잘라진 말이 나와서 묻어 주었다 하는 말무덤이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여송장군(李如松將軍)이 앞으로 3백년간은 대국(大國)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였다 한다.
이러한 설(說)을 보아서 함안(咸安)이란 지리학적(地理學的)으로
비범상(非凡常)한 지세(地勢)를 가진 곳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여송(李如松)이 예언(豫言)한
기한(期限)이나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세(地勢)를 억제(抑制)한 시효(時)도 다 하였으며,
미래에는 남쪽이 높아지는 운세(運勢)로서 미구(未久)에 구활만민(救活萬民)할
세계적인물(世界的人物)이 함안(咸安)에서 출현(出現)할 것이라 하는 것이
경술국치 이후(庚戌國恥 以後)부터 돌아다니는 풍설(風說)이다.

분포상황 (총280호, 1,355명)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70호, 250명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50호, 180명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30호, 110명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60호, 210명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 30호, 105명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60호, 210명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 50호, 180명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30호, 1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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