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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순흥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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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네는 조선왕조의 마지막인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역사에 특기되고
전 민족이 영원토록 추앙해 마지않는 큰 인물 여럿을 배출했다.
다른 어느 성씨의 후손들도 감히 따르지 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병찬(安秉瓚)·안중식(安中植)·안중근(安重根)·안명근(安明根)·안창호(安昌浩)
안재홍(安在鴻)·안익태(安益泰) 등이 있다.

안병찬은 호를 규당(規堂)이라 하고, 홍주(洪州) 향교의 직원으로 오래 있었다.
1906년 고종 광무 9년 52세로 법부 주사일 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철폐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뒤 변호사 자격을 따서 1909년 11월 만주 여순에 가서 안중근의사의 공판 때 무료변론을 했다.
3·1운동 후 만주 안동현으로 가서 대한청년단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 수감되었다가 병보석되자,
다시 만주로 가서 죽림(竹林) 김승만(金承萬)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 총재가 되어
많은 독립운동원을 양성하였다.
그러다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발족할 때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21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얻어서 돌아오다 반대파 공산당원에게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안중식은 호를 심전(心田)이라 하고,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조선왕조 최후의 양대 화가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소림 조석진과 함께 관비로 중국에 그림 유학을 다녀왔고, 한때 양천과 통진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근세에서 현대에 걸쳐 이름이 난 화가들,
곧 관재 이도영, 정재 오일영, 무호 이한복, 정재 최우석, 묵로 이용우, 소하 박승무, 춘곡 고희동, 청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 등이 모두 그와 소림 조석진의 제자들이다.
그는 동양화 뿐만 아니라, 글씨와 시의 재능도 비상했다.
경술국치 이후 소림 조석진과 함께 서화협회를 조직,
초대 회장이 되어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59세의 향년으로 타계했다.

안중근의사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약력은 생략한다.
다만 1909년 10월 26일 동지인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과 통역을 맡은 유동하(柳東河) 등 과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10년 2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5개월 동안 그가 옥중에서 쓴 작품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키로 한다.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인이었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이라는 명저술과 함께 200여 점의 휘호를 남겼다.
그 200여 점의 휘호 중에서 20점이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는데,
다음은 그 20점 중의 일부이다.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피는 꽃은 같아도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다."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 "변변찮은 옷과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와는 일을 상의할 것이 못된다."
人無遠慮 難成大業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을 이룩하기 어렵다."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날씨가 추워진 뒤라야 송백이 내내 푸른 것을 알 수 있다."

안명근은 안중근 의사의 종제로서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그는 종형의 감화를 받아서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남강 이승훈, 백범 김구 등과 교유했다.
그는 남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일원의 부자들에게 자금조달을 하다가 체포되어 몇 달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10년 12월에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선천역두에서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여 체포되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년간 복역 후 출옥하여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 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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